▲ 하정수 전력연구원 수화력발전연구소장

■ 연구계획은 목표를 최대한 높여서

중소기업과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원자력과 화력발전소에 들어가는 중요한 부품을 국산화하자는 데 까지는 의견이 일치됐다. 관련 회사에서 계획서를 작성해오면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정작 가져온 것은 호텔 메모지 한 장이었다. 그 메모지에는 부품의 이름과 규격, 그리고 대략적인 예산 내역이 재료비 몇 억, 국제인증비 몇 억 등으로 대충 적혀 있었다.

국내 중소기업의 현실이 제대로 연구계획서를 작성할 수 없었다. 결국 연구계획서를 작성한 것은 필자이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 과제는 착수하였고 우여곡절 끝에서 국산화에 성공했다. 미국의 Wyle Lab. 이라고 하는 곳에서 국제 공인을 받아서 국내 원자력 발전소는 물론 중국의 원자력발전소에도 수출하는 효자 부품이 됐다.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도 연구계획서를 돕는 사이트가 유료로 운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연구계획서는 개발하려는 기술의 목표를 분명하게 기록하면 된다. 그리고 추진전략과 방법이 체계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으면 사실상 작성이 끝나는 것이다. 잘 짜여진 연구계획서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계획서 잘 짠다고 연구 잘 하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 계획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꼭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솔직히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과제계획서가 몇 백 페이지 되는 경우도 있다. 꼭 양이 많은 것이 좋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처음에 과제 제목부터 제대로 정해야 한다. 제목 정하기가 가장 어렵기는 하지만 가제목이라도 정하는 것이 전체 방향을 잡고 나가는데 유리하다. 연구의 목표와 방향이 제목에 녹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사과제가 있는지도 사전에 검토해야 한다. 정부과제일 경우 과제의 중복성에 걸리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은 혼자 정하지 말고 주변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도 필요하다.

과제계획서는 연구하는 사람보다는 과제를 심의하고 평가하는 입장에서 작성이 되어야 한다. 연구자들은 과제계획서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제의 필요성이나 국내외 기술동향, 추진 전략 등을 서술식의 긴 문장으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핵심 내용을 뽑아 단문형태로 제목을 달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평가자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중요한 키워드를 제시하면 아주 좋은 과제계획서가 된다. 꼭 필요한 곳에 사진과 그림, 도표를 넣는 것도 아주 좋다.

연구의 목표는 정량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세계 최고 수준이상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 연구목표를 SMART하게 제시하라고 한다. 구체적이고(Specific), 측정할 수 있고(Measurable), 달성 가능하고(Attainable), 현실적이고(Realistic), 만져볼(Tangible) 수 있게 제시하라고 한다. SMART한 연구목표는 과제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잣대의 역할을 한다. 요즘의 과제계획서는 연구자가 스스로 제시하는 평가 착안점으로 중간 평가하고 최종 평가를 하고 있다. 평가 착안점을 SMART하게 제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연구원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과제 선정심의위원회를 학술대회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기술적인 것만 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기준은 기술성 만이 아니다. 회사의 경영목표와 R&D 전략과의 연계성, 개발의 필요성, 목표 및 내용, 경제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평가한다. 특별히 연구개발비 편성의 적정성, 과제분야, 연구방법, 연구성격, 위탁기관 선정 등의 적정성도 심의하도록 되어 있다.

발표할 때는 핵심부터 분명하게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영진 앞에서 발표할 때는 특별히 연구목표와 경영현안에 기여하는 바를 확실하게 어필해야 한다. 발표 초반인 2분 이내에 심의위원의 호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발표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로 이러한 요령으로 과제계획서를 작성하고 발표해 국가지정연구실 사업에 선정된 적이 있다. 새로운 천년이 도래한다는 2000년도에 국가지정연구실 사업에 도전했다. 당시 과학기술부에서는 국내의 우수연구 집단들을 매년 산학연 150개의 연구팀을 선정해 5년 동안 집중적인 지원을 하는 제도였다. 말 그대로 과학기술계의 국가대표를 뽑는 것이었다. 경쟁률도 10대 1 이상 3단계에 걸친 심사를 통과하기가 어려웠지만 영광스럽게도 선정된 것이다. 과제 수행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국가지정연구실의 영광이 늘 뇌리에 남아 있다.

과제를 심의하다보면 심의위원들과 말싸움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분명한 것은 과제의 내용은 연구책임자가 가장 많이 아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의위원들은 나름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오해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질문하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편견을 가지고 심의위원이 질문해도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 심의위원의 권위는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 지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과제를 수행할 때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과제가 탈락하는 아픔도 경험해보고 심한 질책을 받아 본 적도 있었다. 그러한 경우 사실 며칠 밤을 제대로 잠자지 못하고 뒤척이기도 했다. 전문가로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 것도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좋은 경험이 되어서 후에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이 됐다.

연구계획서는 세밀하게 작성하되 연구자의 열정을 담아서 작성하고 발표는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치르듯이 좋은 기술을 개발하려면 그만한 고통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연구원들이 연구계획서를 작성할 때부터 열정을 다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